메리 위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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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리 위도우》는 1905년 프란츠 레하르가 작곡한 오페레타로, 앙리 메이야크의 희극을 각색한 것이다. 파산 직전의 발칸 국가 폰테베드로의 부유한 미망인 한나 글라바리를 둘러싼 사랑과 재산을 향한 음모를 유쾌하게 그린다. 1905년 빈에서 초연된 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다양한 언어로 번역, 각색되었고, 영화, 발레 등으로도 제작되었다. 아름다운 음악과 유쾌한 스토리로 호평을 받지만, 일부에서는 가벼운 내용과 여성 캐릭터의 수동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는 앙리 메이야크가 1861년 파리에서 초연한 희극 L'attaché d'ambassade|대사관 부속관fra에 기반한다. 이 희극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상의 독일 대공국이 자국의 부유한 미망인과 백작을 결혼시켜 재산을 확보하려는 내용을 다루며, 독일에서도 각색되어 인기를 얻었다.
2. 역사적 배경
1905년, 빈의 대본 작가 레오 슈타인과 빅토르 레옹이 이 희극을 오페레타로 각색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원작의 설정을 현대 파리와 가상의 발칸 국가로 변경하는 등 이야기를 확장했다. 작곡은 처음 리하르트 호이베르거에게 의뢰되었으나 최종적으로 프란츠 레하르가 맡게 되었다.[1]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레하르는 악보를 완성했고, 작품은 1905년 12월 30일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초연되었다.[1][2]
2. 1. 초연 및 초기 제작 과정
1861년, 앙리 메이야크는 파리에서 희극 L'attaché d'ambassade|대사관 부속관fra을 초연했다. 이 작품은 가상의 가난한 독일 대공국의 파리 주재 대사인 샤르프 남작이 자국의 경제적 파탄을 막기 위해, 프랑스 출신의 부유한 미망인과 백작을 결혼시켜 그녀의 막대한 재산을 독일에 묶어두려는 내용을 다룬다. 이 연극은 곧 독일어로 각색되어 ''Der Gesandschafts-Attaché'' (1862)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1905년 초, 빈의 대본 작가 레오 슈타인은 이 연극을 접하고 오페레타로 각색할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동료 작가 빅토르 레옹과 안 데어 빈 극장의 매니저에게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그들은 함께 대본 작업에 착수했다. 각색 과정에서 배경은 현대 파리로 바뀌었고, 원작의 독일 공국은 가상의 작은 발칸 국가로 설정되었다. 또한, 미망인과 백작 사이에 과거 연인 관계였다는 설정을 추가하고, 미망인이 남작 부인의 불륜을 감싸주기 위해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꾸미는 내용을 넣었으며, 백작이 즐겨 찾는 장소는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이자 나이트클럽인 막심스(Maxim's)로 변경되었다.
처음 작곡은 리하르트 호이베르거에게 의뢰되었다. 그는 이전에 안 데어 빈 극장에서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오페레타 ''오페라의 무도회'' (Der Opernball, 1898)를 성공시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이베르거가 작곡한 초안은 만족스럽지 못했고, 그는 결국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1]
이에 극장 측은 프란츠 레하르에게 작곡을 제안했다. 레하르는 이미 전 해에 레옹, 슈타인과 함께 ''데어 굣테르가테'' (Der Göttergatte)를 작업한 경험이 있었다. 레옹은 처음에 레하르가 파리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었으나, 레하르가 처음 작곡해 온 활기찬 갤럽풍의 멜로디 "Dummer, dummer Reitersmann"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레하르는 몇 달 만에 《메리 위도우》의 악보를 완성했다.
주연으로는 미치 귄터(Mizzi Günther)와 루이 트로이만(Louis Treumann)이 캐스팅되었다. 이들은 이미 ''오페라의 무도회''나 레옹과 레하르가 함께 성공시킨 ''데어 라스텔빈더'' (Der Rastelbinder, 1902) 등 여러 빈 오페레타에서 남녀 주연으로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는 인기 배우들이었다. 두 주연 배우는 작품에 대한 열정이 높아, 극장의 빠듯한 예산을 보충하기 위해 자신들의 화려한 무대 의상 비용을 직접 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허설 기간 동안 극장 측은 작품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잃고 레하르에게 작품 철회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레하르는 이를 거절했다.[1] 결국 작품은 초연 전에 충분한 무대 리허설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2]
《메리 위도우》는 1905년 12월 30일 빈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한나 글라바리 역은 귄터, 다닐로 다닐로비치 백작 역은 트로이만, 제타 남작 역은 지크문트 나츨러(Siegmund Natzler), 발렌시엔 역은 애니 뷔른슈(Annie Wünsch)가 맡았다. 초연 직후 몇 주간 흥행 성적은 다소 불안정했지만, 곧 비평가들의 호평과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큰 성공을 거두어 총 483회 공연되었다.[2] 이듬해인 1906년에는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순회 공연을 가졌다.
원래 이 오페레타에는 서곡이 없었으나, 레하르는 400회 공연을 기념하여 서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는 짧고 간결한 원래의 도입부가 더 선호되어 이 서곡이 연주되는 경우는 드물다.[1] 빈 필하모닉은 1940년 4월, 레하르의 70세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에서 이 서곡을 연주한 바 있다.[3]
항목 | 내용 |
---|---|
작곡 | 프란츠 레하르 |
원작 | 앙리 메이야크의 『대사관 부속원』 (LAttache dambassadefra) |
대본 | 빅토르 레옹, 레오 슈타인 |
언어 | 독일어 |
초연 | 1905년 12월 30일, 오스트리아 빈 안 데어 빈 극장 |
초연 지휘 | 프란츠 레하르 (부지휘: 로베르트 슈톨츠) |
2. 2. 세계적인 인기와 각색
《메리 위도우》는 1905년 빈 초연 이후 빠르게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06년에는 함부르크의 노이에 오페레텐-테아터, 베를린의 베를리너 테아터, 부다페스트의 마자르 시네하즈 등에서 공연되었으며, 특히 부다페스트에서는 충실한 헝가리어 번역으로 상연되었다. 베를린 공연은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대화를 포함한 최초의 완전한 녹음으로 제작되기도 했다.[2] 이 작품은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고, 190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최소 5개의 프로덕션이 각기 다른 언어로 공연될 정도였다. 스톡홀름, 코펜하겐, 밀라노, 모스크바, 마드리드 등 세계 주요 도시들에서도 공연이 이어졌으며, 극장 산업이 있는 거의 모든 도시에서 제작되었다. 베르나르트 귄은 그의 저서 《금과 은: 프란츠 레하르의 삶과 시대》에서 《메리 위도우》가 초창기 60년 동안 약 50만 번 공연되었다고 추정한다. 악보 판매와 녹음 수익은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달러에 달했으며, 작품의 인기는 패션계에 영향을 미치고 다양한 상품화를 촉발했다.[5] 극작가 존 켄릭은 1960년대까지 이 작품만큼 국제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둔 뮤지컬은 없었다고 평가했다.[6]
특히 영어권에서의 성공이 두드러졌는데, 바실 후드가 각색하고 에이드리언 로스가 작사한 영어 버전은 1907년 6월 8일 런던의 데일리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릴리 엘시(한나 역)와 조셉 코인(다닐로 역)이 주연을 맡았으며, 조지 그레이브스(제타 남작 역), 로버트 에베트(카미유 역), W. H. 베리(니치 역) 등이 출연했다. 의상은 루실과 퍼시 앤더슨이 담당했다.[7] 이 공연은 런던에서 778회라는 기록적인 공연 횟수를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 전역에서 순회 공연을 가졌다.[6] 영어 각색 과정에서는 원작의 배경인 몬테네그로 왕가(당시 왕세자 이름이 다닐로였고, 제타 공국이 주요 구성 국가였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공국의 이름을 '마르소비아(Marsovia)'로 바꾸고,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한나를 '소냐(Sonia)', 제타 남작을 '포포프(Popoff)', 발렌시엔을 '나탈리(Natalie)' 등으로 변경했다.[7] 또한 마지막 3막의 배경을 원작의 테마 파티 대신 유명 나이트클럽인 맥심으로 옮겨 화제성을 더했다. 조지 에드워즈의 요청으로 레하르는 영어 버전을 위해 두 곡을 추가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중 니치의 솔로곡인 "Quite Parisien"은 일부 프로덕션에서 여전히 사용된다.[6]

미국에서는 1907년 10월 21일 브로드웨이의 뉴 암스테르담 극장에서 후드/로스 대본을 사용하여 초연되었으며, 416회 공연을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델 잭슨이 소냐 역을, 도널드 브라이언이 다닐로 역을 맡았다. 이후 미국 전역에서 여러 순회 극단에 의해 공연되었고, 1908년에는 호주에서도 처음 공연되었다. 영어권에서는 이후에도 꾸준히 재공연되었는데, 런던에서는 1923년(239회), 1924년, 1932년, 1943년(302회) 등에 리바이벌되었고, 뉴욕에서도 1921년, 1929년, 1931년, 1943-44년에 주요 리바이벌 공연이 있었다. 특히 1943년 뉴욕 리바이벌은 마르타 에거스와 얀 키푸라 부부가 주연을 맡고 조지 발란신이 안무를 담당하여 매제스틱 극장에서 322회, 다음 시즌 뉴욕 시티 센터에서 32회 공연되었다.[9]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영어 번역과 각색도 등장했다. 1958년 런던의 글록켄 베르라그(Glocken Verlag Ltd)는 필 파크와 로널드 해머의 버전, 그리고 크리스토퍼 해설의 버전을 출판했다. 해설 버전은 3막의 배경을 맥심으로 설정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1970년대에는 뉴욕의 맨해튼 라이트 오페라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딸인 앨리스 해머스타인 마티아스에게 의뢰하여 새로운 영어 각색본을 제작, 공연했다.[10][11] 1998년과 1999년에는 호주의 에스지 엔터테인먼트가 존 잉글리시, 헬렌 도널드슨, 사이먼 갤러허, 제프리 블랙, 마리나 프라이어, 존 오메이, 맥스 길리스 등이 출연한 프로덕션을 호주 주요 도시(브리즈번, 멜버른, 시드니, 애들레이드)에서 공연했다.
수많은 오페라 극단들도 《메리 위도우》를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다.[6] 뉴욕 시티 오페라는 1950년대부터 여러 차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특히 1977년에는 셸던 하르닉의 새로운 번역으로 베벌리 실스와 앨런 타이투스가 출연한 호화로운 프로덕션을 선보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오페라에서는 조안 서덜랜드가 주연을 맡았고, 2002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프로덕션은 PBS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12]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2003년까지 18번이나 이 작품을 공연했으며,[13] 런던의 로열 오페라는 1997년에 처음으로 공연했다.[14]
프랑스에서는 1909년 4월 28일 파리 아폴로 극장에서 La Veuve joyeuse|라 뵈브 주아외즈프랑스어(''즐거운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다. 파리 시민들의 묘사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호평을 받으며 186회 상연되었다. 이 버전에서는 한나가 '마르소비에(Marsovie)' 출신의 미국인 '미시아(Missia)'로, 다닐로는 도박 빚이 있는 왕자로 설정되었고 3막은 맥심에서 진행되었다.[6] 이듬해에는 브뤼셀에서도 공연되었다. 이탈리아어로는 La Vedova Allegra|라 베도바 알레그라it로 번역되었다.[15]
《메리 위도우》는 빈에서도 자주 재공연되며, 특히 빈 폴크스오퍼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독일어권에서는 배우 요하네스 헤스터스가 30년 이상 수천 번 다닐로 역을 연기하며 이 역할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3. 등장인물
1905년 12월 30일
지휘자: 프란츠 레하르